0518. 처녀공양

[이 글은 2007년 한님의 블로그 TOP10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컴퓨터를 켰을 때 제가 먼저 하는 일은 메일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변함 없이 그 일을 반복했는데 오랜만에 보는 발신인에서 메일이 들어왔습니다. 그 친구한테서 오는 메일이 늘상 그렇지만 본문 없이 음성 파일이 하나 달랑 첨부된 메일이 말이죠. 다른 용건이 있다면 전화로도 충분하니 그런 것이지만 조금 휑한 그의 메일을 받고 나면 왠지 아쉽기도 합니다. 물론 그 알맹이는 휑하지 않겠지만…

이번 메일은 “20070715_○○군△△면□□리_처녀공양.mp3″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고, 똑같은 이름의 파일이 첨부되어있었습니다. 파일을 옮겨놓고 재생을 하니 자동차 시동이 꺼지는 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7월 15일 오후 1시 24분. 김◇◇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내 그 친구와 김◇◇ 할머니일 목소리의 대화가 흘러나왔습니다. 청을 받은 할머니는 옛날에 이 마을에 살던 괴물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런 이야기였죠.

수 백 년 전의 옛날, 큰 전쟁(임진왜란인 것 같습니다)이 끝날 무렵에 마을 근처의 산에 괴물이 한 마리 흘러들어왔습니다. 키는 마을 부잣집 지붕보다도 높이 솟고 덩치도 우락부락하며 힘도 장사인, 사람 같기도 하고 사람 같지 않기도한 괴물이었습니다. 무섭게 생긴 외모지만 우둔하고 비교적 온순해서 처음 몇 년 동안은 마을과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지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게 오래 가지는 못했죠. 괴물이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이를 낳을 처녀를 한 명 바치라고 요구하면서 마을의 밭이며 가축들에 해를 끼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관에서는 전쟁 후의 어려운 상황에다가 마을의 피해가 크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별 조치를 취해주지를 않았죠. 괴물이 우둔하긴 했지만 워낙 장사라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결국 처녀를 한 명 바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괴물은 자기의 아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괴물이 너무나도 우둔해서 어떻게 아이를 만드는지 모른다고 했고, 할머니의 아버지는 그 괴물 역시 암컷이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날이 계속 흐르면서 마을의 지혜로운 사람이 꾀를 내었습니다. 괴물에게 바친 처녀를 사모하던 청년에게 괴물의 둥지로 몰래 들어가라고 한 것입니다. 청년은 해가 떠올라 괴물이 잠든 틈을 타서 처녀를 만났습니다. 그렇게 여러 달이 지나 처녀가 임신을 하여 몸을 추스리기 힘들어지자 괴물은 처녀를 마을로 돌려보냈습니다. 달을 채워 아이를 낳게 되면 자기에게 보내라고 하고 말이죠. 물론 때가 되어 그 처녀가 낳은 아기는 사람의 아이였으니 그럴 수는 없었죠. 지혜로운 사람은 다시 꾀를 내었습니다. 나무로 괴물과 비슷하게 생긴 아기 인형을 깎아서 포대기로 감싼 다음에 괴물에게 내어준 것이죠. 괴물은 홀딱 속아넘어가 인형을 안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너무나 우둔했던 괴물은 시간이 흘러 나무가 썩어 인형이 부서져도 속았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아이가 죽었다며 슬퍼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마을에 처녀를 요구했죠.

그것은 그대로 마을의 풍습이 되었습니다. 괴물이 매번 똑같은 방법에 속아넘어간다는 것을, 그리고 잡아간 처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된 마을 사람들은 수십 년에 한 번 씩 괴물이 처녀를 요구하면 같은 방법으로 처녀를 돌려받고 나무 인형을 줬죠. 할머니가 어렸을 때까지도 그 괴물과 풍습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아홉 살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팔십삼 년 전에 그 풍습은 끝났습니다.

괴물이 다시 마을에 처녀를 바치라고 요구했을 때 결정된 처녀는 약초를 캐는 청년과 매우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괴물의 둥지로 들어간 후로 풍습대로 청년은 매일 음식과 옷가지 등을 가지고 처녀를 찾아가 지내는데 불편함이 없게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은 더욱 깊어졌는데, 여러 달이 흘러 처녀가 아이를 배고 어느 날부턴가 청년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청년에 대한 걱정으로 얼굴은 어두워지고 몸도 힘들어지자 괴물은 서둘러 처녀를 마을로 돌려보냈습니다. 마을에 돌아온 처녀를 기다리고 있던 소식은 불안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청년이 어떤 들짐승에게라도 물렸는지 심하게 훼손된 사체로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죽은 청년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지만 이미 장사까지 치뤄 무덤에 풀까지 무성하게 자라있었습니다. 처녀는 너무나도 슬펐지만 곧 자신을 추스렸습니다. 자신의 몸 속에 자신이 사랑한 이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도 세월은 흘러 마침내 산달이 되었습니다. 밤 중으로 해산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할머니의 아버지는 어린 할머니와 할머니의 어머니를 깨워 마을 입구에 나가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거든 마을에서 도망치라고 당부했죠. 왜 그런지 묻자 아버지는 달이 안 맞는다는 이야기만 했고, 어머니는 그 말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그 말에 따랐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예닐곱 명 정도의 아주머니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주머니들과도 달이 안 맞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어린 할머니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당겨 물어보려고 했습니다.그 때 마을 안 쪽에서 굉음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불길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거야. 바로 그 처녀가 살던 집에서 말이지. 마을 안에서는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고 나는 너무 무서워서 울면서 어머니 치맛자락만 잡고 있었어.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도망쳐 나오는게 보이기 시작하는데, 어머니는 나오는 사람 중에 아버지가 없는지 살펴보기만 하셨어. 어서 도망치라는 사람들의 고함소리에도 아랑곳않으셨지. 아버지가 무사한 걸 알 때까지는 자리에서 꼼짝 않으려하셨던 모양이야. 하지만 사람들 뒤에 보인건 아버지가 아니었어.”

전에도 본 적 없고 이후로도 본 적 없는 괴물이었다고 합니다. 키는 어린 할머니 정도로 작고 두 발로 걷고 있었지만 생긴 것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개나 늑대와 같았고, 붉을 살에는 드문드문 털이 다른 곳에서 묻어온 듯이 박혀있었습니다. 몸 전체는 맑고 약간 끈적여보이는 액체로 뒤덮여 있었죠. 그리고 숨을 쉴 때마다 코와 입에서는 불길이 뿜어져나왔습니다.

괴물은 그 처녀가 낳은 것이었습니다. 저 새끼 괴물의 진짜 아비일 어떤 괴물이 청년을 죽이고 둔갑해서 청년 행세를 하였다고 보는 것이 설명이 될 것 같네요. 달이 맞지 않다는 이야기도 처녀가 아이를 밴 것이 청년이 죽은 것보다 훨씬 후였다는 말이었겠죠. 청년을 죽인 들짐승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그 또다른 괴물이었을테고요.

새끼 괴물이 점점 다가오고 할머니가 이젠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멀리서 큰 바위가 굴러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괴물과 사람이 함께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산에 사는 괴물이 마을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산괴물은 엄청난 속도로 새끼 괴물이 있는 곳까지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새끼 괴물을 소중하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끌어안았습니다. 새끼 괴물은 격렬하게 발버둥을 치고 불을 뿜어댔지만 산괴물은 전혀 아프지 않은 듯이 새끼 괴물을 안은 채로 산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멍하니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습니다. 아직 새끼 괴물이 마을에 질러놓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만요.

“그 처녀는 괴물을 낳고 죽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무사하셨어. 불 때문에 피신하지 못한 사람들을 구하고 계셨던 모양이야. 아무튼 그 후로 마을의 누구도 그 괴물과 아기 괴물을 보지 못했어. 마을의 풍습도 끝이 난거지.”
“아이가 생겨서 풍습은 사라졌다고 해도, 괴물들은 그 산 속에 계속 살지 않았나요?”
“그렇진 않을거야. 나중에 마을 어른들이 몇 차례 괴물의 둥지를 찾아갔지만 괴물을 볼 수 없었다고 했거든.”
“그 위치는 혹시 기억하고 계시나요?”
“응. 그런데 가서 뭐하게? 세월이 많이 흘러서 살던 흔적도 남지 않았을텐데.”

거기에서 파일은 끝났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저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겠죠. 실제로도 저는 괴물의 흔적이나 이야기의 진위에는 관심이 없고요.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혹시 이것을 읽는 분 중에 그렇지 않은 분이 있다면 그 친구에게 한 번 연락해보세요. 어쩌면 놀라운 것을 만나게될지도 모릅니다. 연락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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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2개 »

Gravatar Comment - lchocobo (#)
2007-09-30 14:56:50

음, 꽤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책속에 나오던 전래동화(…애들용은 아니겠지만)와 비슷한 것도 같지만, 역시 실제 겪었다는 사람이 해주는 이야기라서 그런지 꽤나 실감이 있는데요.

Gravatar Comment - 한님 (#)
2007-09-30 19:33:34

새벽에 올려놓고 친구한테 보여줬다가 해뜰 때까지 태클 당한 글인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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